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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토종 문화를 찾아서 (책에 소개된 기사 발췌, 실천문학사, 2001년 6월 출간)
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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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문학사, 2001. 5. 21 펴냄 글 이용한, 사진 심병우 | |
사라져가는 옛 올챙이 국수맛을 지켜가는 사람 올챙이 국수장수 신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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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준비하기
어느덧 가을이 시작된 봉평 들녘에는 희디흰 메밀꽃이 절반 넘게 지고, 붉은 꽃대궁만 화안히 가을 햇살에 젖어 있다. 아쉽게도 메밀꽃 필 무렵의 알싸함이 다 지난 봉평의 가을. 그래도 사람들은 삼삼오오 한적한 봉평의 가을에 취해 흥정천을 거슬러 오른다.
게중에는 더러 효석을 만나려 휑덩한 그의 생가를 찾아 차를 몰아가는 이들도 있다. 아마도 그들은 물레방앗간에서의 잊을 수 없는 하룻밤 이야기에 한번쯤 넋을 주었거나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꽃 풍경에 한동안 푹 빠져보았던 사람일 것이다. 우리가 탄 차는 바로 그들의 꽁무니를 바싹 뒤좇았다. 하지만 우리의 봉평 나들이는 그들과 사뭇 다른 것이어서 봉평에서 알아주는 올챙이 국수장수를 찾아가는 길이다.
올챙이 국수 하면, 강원도 여러 곳에서 간간 맛볼 수 있는 것이지만, 평창이야 말로 올챙이 국수의 옛 맛이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닷새마다 열리는 봉평장에 가면 이 옛맛 그대로의 올챙이 국수를 맛보러 일부러 멀리서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봉평면 창동리에 사는 신보현 씨(60)의 손 맛을 잊지 못해 찾아온 사람들이다. 대체 올챙이 국수가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단 말인가!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신보현 씨를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듯하다.
신보현 씨의 집은 효석 생가로부터 불과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창동4리에 위치해 있는데, 흥정천을 건너 전시용 물레방앗간과 메밀밭을 지나면 금방이다.
해가 뉘엿뉘엿할 무렵 신씨의 집에 들어서자 사람은 보이지 않고, 마당 한쪽에 옥수수만 수북히 쌓여 있다. 필경 저 옥수수가 올챙이 국수의 재료가 될 터이다. 잠깐 옥수수에 눈을 주고 마당을 서성이고 있는데, 집 옆으로 펼쳐진 옥수수밭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크게 들리더니 이내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바구니 가득 옥수수를 꺾어 나오는 신보현 씨다. 다 저녁에 옥수수를 꺾고 있었던 것이다.
옥수수 바구니를 옆에 낀 신씨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그 쪽에서도 꾸벅 고개를 숙여온다. 사실 신씨와는 초면이 아니었다. 1년 전 봉평장에서 우연히 올챙이 국수를 파는 신씨를 만나 이미 얼굴을 튼 사이였다. 그럼에도 신씨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1년 전 잠깐 얼굴 들이밀고 1년 후에 와서 나 알아보겠수, 하면 알아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내일이 봉평장이라서 올챙이 국수 만드는 것 좀 보러 왔어요"
그제서야 신씨는 마당에 서 있는 사내가 어떤 까닭으로 와 서 있는지를 알아챘다. 물론 그의 표정은 그런 것 따위 보아서 무엇하겠느냐는 표정이었지만, 보겠다고 우기니 그러라고 하는 눈치였다.
"올챙이는 내일 만들어요" "그럼 오늘은 뭐 합니까?" "그냥 옥수수나 벳기죠 뭐. 그래 옥수수알을 따서 그걸 물에 불렸다가 내일 새벽에 갈아서 끓이면 돼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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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갈기
그리하여 마당에서는 신씨의 옥수수 벗기기가 시작되었다. 보아하니 이미 여물대로 여문 옥수수들이었다. 나도 조금 거들어 잔뜩 쌓여있던 옥수수는 순식간에 껍질을 벗었다. 이제부터는 알을 따내는 작업. 일일이 손으로 따내서는 밤을 새도 못한다. 그래서 신씨가 고안해낸 방법은 칼을 이용해 알을 따내는 것이다. 따낸다는 표현보다는 깎는다는 말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옥수수에 칼을 대고 한 번에 너댓 줄씩 깎아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이렇게 칼로 깎아도 밤새 깎아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신씨의 능숙한 칼 솜씨로는 착착착착, 네번이면 옥수수 한 통이 금세 빈 통으로 변한다.
다 따낸 옥수수알은 갈아내기 좋게 물에 불린다. 본래는 올챙이 국수를 만들 때 알갱이가 연한 풋옥수수를 갈아서 만들지만, 풋옥수수도 한철이라 매번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풋옥수수로 만든 올챙이 국수는 맛이나 향이 훨씬 더 뛰어나다고 한다. 그러나 풋옥수수가 나는 철이 아닌 이상 딱딱한 옥수수알을 물에 불렸다가 한다.
옥수수를 물에 담그고 나자 신씨는 바삐 부엌으로 향했다. 무엇 하나 뒤따라가 보았더니 도마에 풋고추를 올려놓고 잘게 다지고 있었다. 조선 간장이 옆에 놓인 것으로 보아 양념장을 만들려는 모양이다.
"올챙이는 간장 맛이 좋아야 돼요. 조선 간장에 풋고추를 썰어넣구 해야 궁합이 맞아요. 왜간장 갖다가 찔떡찔떡 부어주면 그게 무슨 맛이 나. 근데 지금두 다른 사람들 보면 왜간장 갖다 쓰는 사람들이 있어. 또 올챙이 간장은 고춧가루 터북하게 해서는 절대 제맛이 안 나요. 그래서 우리 집은 조선 간장 항아리가 이만해. 많이 쓰니까."
그가 팔을 있는 힘껏 벌려 간장 항아리를 표현했다. 그에 따르면 올챙이 국수를 만들기 위한 오늘의 준비는 여기까지라고 한다. 옥수수를 갈고, 끓이고, 젓고, 틀에 부어서 국수를 뽑는 일은 모두 내일 새벽이나 되어야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튿날 새벽 4시 반. 잠이 덜 깬 몸을 추스르며 신씨네 집에 도착하자 이미 그는 밤새 불린 옥수수를 갈아내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올챙이 국수를 내러 시장에 나가는 날이면 언제나 새벽 4시에 일어난다고 한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옥수수를 갈 때 쓰던 것은 맷돌이었으나, 지금은 워낙에 시간이 많이 걸려 기계로 갈아내는데, 기계로 갈 때도 요령이 필요하단다. 이야기인 즉슨, 올챙이 국수에 들어갈 옥수수는 껍질이 많아서 엉글게 갈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물에 불려내긴 했어도 갈아낼 때는 한 번 더 물을 넣어 갈아야 잘 갈아진단다.
이렇게 갈아낸 옥수수는 체로 한 번 더 걸러낸다. 찌꺼기와 껍질을 가려내기 위함인데,이때 나온 찌꺼기는 가축 사료로 주고, 밑에 떨어진 고운 가루는 가라앉아 앙금이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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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챙이묵 끓이기
물과 함께 갈아냈기 때문에 위에는 맑은 물이, 밑에는 앙금이 가라앉는 것이다.
한 번 넣었다가 저어주고, 앙금이 다 가라앉으면 위에 뜬 맑은 물을 떠내 가마솥에 넣고 먼저 끓인다.
그리고 팔팔 물이 끓을 때쯤 앙금을 넣어주는데, 앙금은 모두 세 번에 나눠 넣어준다.
한꺼번에 다 넣어주면 국수발의 찰기가 덜하다는 것이다. 또한 앙금을 넣을 때는 골고루 저어주면서 넣는다. 또 한 번 넣고는 저어주고 그래야지. 신씨에 따르면 앙금을 넣은 뒤부터 보통 한 시간 넘게 끓여야 묵 상태가 된다고 한다.
"다 끓여서 계속 젓다보면, 인제 이게 묵이 되는 거요."
그리고 이 옥수수묵이 올챙이 국수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아침 7시 반. 길다란 나무주걱으로 솥 안을 젓던 신씨가 주걱질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남편인 김영래 씨(59)를 불렀다. 드디어 국수를 뽑으려는 모양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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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챙이 뽑아내기
남편은 익숙하게 함지박에 찬물을 받아 그 위에 가마처럼 생긴 국수틀을 올렸다. 가마처럼 생겼다는 것은 틀을 받치는 다리까지 합쳐서 그렇게 생겼다는 것이다.
국수틀만 보면 그냥 네모난 나무상자나 다름없다. 다만 나무틀 밑에다 양철을 대고 촘촘하게 구멍을 뚫어놓았다는 것이 국수틀의 다른 점이다.
이 국수틀에 옥수수묵을 떠넣고, 틀덮개로 꾹 누르고 있으면 국수 가락이 함지박 안의 찬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때 국수 가락이 처음 나오는 모양을 보면 마치 올챙이처럼 생겼다. 올챙이 국수란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온 것이다.
국수를 뺄 때 물에 떨어지는 모양이 올챙이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본래 옛날에는 박 바가지에 구멍을 뚫어 국수틀을 대신했다고 하는데, 지금의 국수틀보다 바가지에서 떨어지는 구수 가락의 모양이 훨씬 더 올챙이를 닮았다고 한다.
아내가 국수틀에 묵을 떠넣을 때마다 남편인 김영래 씨는 틀덮개로 꾹꾹 눌러 국수 가락을 빼낸다.
함지박 하나에 국수발이 가득 차자 또 다른 함지박을 가져와 꾹꾹. 결국 세 개의 함지박을 다 채우고 나서야 국수 뽑는 일이 끝났다. 하지만 여기서 다 끝난 것은 아니다. 함지박에 떨어져 쌓인 국수는 찬물에 몇 번 더 헹궈내야 한다. 면발이 뜨거우면 한낮에 상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올챙이 국수란 것이 주로 여름과 가을에 먹는 것이므로 본래 시원하게 먹는 찬 음식이다. 이렇게 헹궈낸 국수는 다시 비닐 자루에 찬물과 함께 넣어 묶은 뒤, 함지박에 담는다. 이제 남은 것은 양념장과 김치를 챙겨 시장까지 나르는 일만 남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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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 사이로...
오래 전 신씨네 집에서는 국수를 손수레에 실어 시장까지 날랐다고 한다. 물론 그 전에는 머리에 이고 나르기도 했단다. 올챙이 국수를 실은 손수레가 메밀꽃이 핀 봉평 들녘을 지난다고 생각해 보라.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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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상상과는 달리 신씨는 손을 내저었다
"아이구, 니어까에 실어나르면 덜컹덜컹해서 함지박에서 국수발 떨어지지, 물 떨어지지, 말도 못해요. 시장에 가면 니어까 바닥이 물바다야. 그래 5~6년 지나서 경운기로 갖고 대녔지. 그러다 지금은 차루다 대녀."
국수를 만들고 파는 것이야 신씨 몫이지만, 지금껏 국수 누르는 일에서부터 나르는 일까지는 모두 남편이 도맡아 해왔다고 한다.
올챙이 국수를 차에 싣고 봉평장에 도착해 보니, 오전 9시 40분이 돼가고 있었다. 정신 없이 바쁜 아침이었다. 차에서 함지박을 내리는 신씨를 보고는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아는 체를 한다. 벌써부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신씨를 기다린 할머니도 있었다. 점심 나절도 이른데, 신씨가 올챙이 국수를 내려놓자 몇몇 사람들이 함지박 주위로 몰려들었다. 국수를 내려놓기 바쁘게 장사가 시작됐다. 그릇에 국수 가락을 퍼담고 양념간장과 김치를 내놓는 게 전부인데도,사람들은 군침을 삼키며 금세 그릇을 비워낸다. 아예 한 그릇을 더 시켜먹는 사람도 있다.
의정부에서 왔다는 장성심 씨(45)는 올챙이 국수맛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맛이 시원하고 고소한 게, 면발이 부드러우니까 잘 넘어가요. 국물도 양념장을 넣어 그런지 매콤하고 개운해요. 텔레비전전전에서만 보다가 이렇게 봉평에 와서 먹어보니, 정말 별미네요."
신씨에 따르면, 가장 바쁜 시간은 점심 때인 11시에서 1시 사이란다.
"더울 때는 엄청나게 바빠요. 이게 찬 음식이니까. 여름에 풋고추 간장에 올챙이 국수면 입맛 없을 때 그만이지. 저녁 때꺼리도 마땅치 않고 그럴 때도 사람들이 가끔 찾어요. 지금은 가정에서 할라면 힘들으니까 안하지. 품이 많이 드니까. 장날에 이래 보면, 할머이들이 나를 기달려요. 여름에는 더 기달려요. 오늘 내가 안 나가면 할머이들이 그냥 왔다갈 꺼 아니우. 그래 장날마다 가는 거지 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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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챙이 맛보기
신씨에 따르면 작년 메밀축제 때는 하루에 최고 260그릇까지 팔아봤다고 한다. 그때는 오전에 이미 가져온 국수가 다 팔려, 집에 가서 한 번 더 해왔다는 것이다. 보통 장날에 신씨가 파는 양은 100그릇에서 150그릇 정도. 그 동안 한 번도 남기고 온 적은 없다.
"맨들 때 넉넉하게 맨들어서 가요. 공짜루 줄 것도 있구, 더 줄 것도 있으니까."
여름철 음식이긴 하지만 신씨는 4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올챙이 국수를 낸다.
"처음에는 이게 3백50원으로 시작해, 천원이 되구 1천3백 원이 되구, 1천5백 원 하다 지끔은 2천 원 해요. 그래두 아직 천 원인 줄 알구 천 원만주고 먹자면 그냥 받구 주긴 해요."
사실 평창 읍내를 비롯해 강원도 몇몇 곳에 올챙이 국수를 파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주변 사람들 얘기로는 신씨네처럼 잘 팔리는 집이 없다고 한다. 옛날 어머니 손 맛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올챙이 국수를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79년. 20년이 넘은 셈이다.
"첨에는 그저 애들 등록금 하나라두 보탤려구 했지. 그해 옥수수가 흉년이 들었어요. 흉년이 들면 옥수수가 여물지를 않어요. 안 여문 옥수수는 쌀(알갱이)이 안 나온다구. 그래서 먹을래이 먹을 게 없어. 그래 그거를 뭐시다 쓰나, 그럭하다가 돈두 하두 필요하니 올챙이 국수를 맨들어 팔기로 한 거쥬.
그 전에는유 돈벌 게 없수. 아이들은 여럿이쥬, 식구는 많쥬, 안할 수가 없어. 그 전에는 봉평에서 우리만 이거 했어. 그때 우리 앞집에 아줌마가 있었는데, 같이 했어요. 그걸 해가지구 시장엘 갔더니 을마나 잘 팔리는지 몰라. 이건 만들지를 못해서 못 파는 거여. 하루 두 번식 맨들어 가두 모잘라서 못 파는 거여. 그때는 시장 사람들두 왜 사람이 많잖어. 그러니 금방 팔지. 하이튼 첫해부터 엄청나게 팔았지. 지금까지 올챙이 장사 중에 나만큼 그릇 숫자 많이 냉긴 사람이 없어. 한 그릇에 350원 받고 팔 땐데, 그렇게 잘 팔려두 내가 100그릇을 다 못 만들었어. 지끔이야 그저 날 기다리는 사람이 많으니까 하지만서두."
본래 그의 고향은 용평면 노동리라는 곳. 열한 살 될 때까지 고향에 살다가 그해 어머니를 잃고, 이사를 나왔다고 한다. 당시는 전쟁중이어서 이래저래 죽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 우리가 도사리란 곳으로 이사를 나왔어요. 거기서 스물한 살 때까지 살고, 결혼해서 일루 와 여적지 사는 거유. 부모님은 원래 다 이북 평안도 사람이유. 우리 어무이 돌아가시구, 우리 할머니가 올챙이 국수를 그렇게 잘하셨어요. 그때는 이 올챙이 국수가 식생활이었지. 주식으로 해먹은 거유. 나두 할머니한테 배워 하는 법이야 알았지만, 이게 장사가 될 줄은 몰랐어유. 내가 처음으로 시장에 올챙이를 들고 나가니, 서로 사먹지 못해서 앙삭이지 뭐요. 장사하면서 국수틀을 밑이 빠지면 또 밑을 해대구 해서 세 번을 해댔어요. 틀은 목수가 짜구, 밑바닥은 내가 손수 양철루다 맨들어 못으로 구멍을 뚫어서 했지. 옛날 틀에서는 국수를 말면 일곱 그릇이 나와. 지금 꺼보다는 틀이 적어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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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육십, 올챙이 스무해
천성적으로 그는 부지런함을 타고난 모양이다. 지금은 굳이 시장에 나가 좌판을 벌이고 올챙이 국수를 팔지 않아도 될 만큼 생활의 여유가 생겼으면서도 그는 장날만 되면 습관처럼 올챙이 국수를 만들게 되더라는 것이다.
"딸네미 결혼시키고 들어온 날두, 다음날이 장날인데, 옥수수를 담갔어요. 새벽에 일할 생각을 하면, 으휴 몸썰난다 하면서두 끝내는 허는 거유. 이게 옥수수 한 개에서 한 그릇 나와요. 지금두 내가 장날만 가까우면, 퍼뜩 자면 안 되지, 놀면 안 되지, 하는 생각이 들어. 농사지민서 이 장사 했으니까, 내가 남 곱은 일했을 거유. 그러고 보면 인생 육십이 참 길어요. 살아온 걸 생각하면, 여적지 살았는데, 이제 육십 살았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신씨의 인생 육십. 그래도 헛 장사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들 다 키워 좋은 대학 보내고, 결혼시키고, 어느덧 손주까지 봤으며, 그런대로 농촌에서 빚지지 않고 살고 있으니, 이 정도면 남는 장사를 한 것이 아닌가.
이틀에 걸쳐 신씨를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었지만, 그는 싫은 소리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바쁜 점심때가 지나 우리가 간다고 하자, 그는 간다는 우리를 앉혀놓고 올챙이 국수를 한 그릇씩 말아주었다. 옥수수의 고소한 맛과 양념간장의 매콤하고 간간한 맛이 입 안에 착착 감겨왔다. 이 맛에 올챙이 국수를 먹는 것이렷다.
오후 3시를 넘기면서 마지막 남은 함지박도 드디어 바닥을 드러냈다. 우리가 거의 마지막 손님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맛있게 국수 그릇을 비우고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몰래 국수값을 그의 주머니에 넣고 시장을 나왔다. 차에 돌아와서 보니, 이게 웬일인가. 내가 찔러넣었던 천 원짜리 몇 장이 고스란히 내 주머니에 도로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그는 그렇게 거기서 국수 한 그릇 만큼의 정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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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 수첩
신보현 씨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 되었던 봉평면 창동리에 산다. 창동에 가려면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장평 인터체인지로 나와 6번 국도를 타고 흥정천을 따라 오른다. 장평에서 얼마 가지 않아 봉평장이 서는 창동이 나오는데, 신씨가 사는 곳은 여기서 다시 효석 공원 쪽으로 꺾어져 효석 생가 가는 방향으로 더 올라가야 한다. 효석 공원을 지나면 다리가 나오고, 다리를 건너 물레방앗간을 지나 조금만 더 올라가면 왼편으로 몇 채의 집이 모여 있는 마을이 나오는데, 거기가 바로 신씨가 사는 창동4리다. 마을에서 만나는 첫번째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여기서 효석 생가는 지척이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 이곳을 찾으면 메밀꽃과 올챙이 국수맛을 동시에 볼 수 있을 것이다. 봉평장은 2일과 7일에 열리는 5일장이다.
신보현(60, 평창군 봉평면 창동4리 516번지, 033-335-05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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